시라이 사토시, 『카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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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 사토시, 『카를 마르크스』

2024. 11. 9.

역자: 노경아

출판사: 까치

 

 

 기억에 남는 구절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점을 "무한히 심화하는 경향"으로 파악한 듯하다. 그러나 근대 인류는 그 "심화"를 "진화"로 보고 기뻐했다.
사회의 생산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상품이 넘치고 사람들의 욕망이 충족되면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구동하려면 아무리 소비해도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정신 상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소비 사회란 그 단계에 도달한 사회를 말하며, 그것은 "영원한 욕구불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로 가동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인 사회"는 인류 사회의 평소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생한 특수 상태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인간 사회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자본가는 봉건 시대의 지배자가 져야 했던 "피지배자의 생활을 고려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똑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자본가가 굳이 지극한 도덕심을 발휘하여 노동자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 계급은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를 지배하면서 예전에 지배자에게 부과되었던 의무만 면제받은 셈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그려낸 "근대적 평등의 그림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인류의 생활이 쾌적해졌다", "세계화가 행복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헛된 희망이다. 자본은 인간의 희망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맹목적인 가치 증식 운동을 무한히 반복할 뿐이다. 인간의 행복이 가치 증식에 도움이 된다면 자본도 그 행복을 실현하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인간의 불행이 가치 증식에 도움이 된다면 자본은 거리낌 없이 그 불행도 활용할 것이다.
포디즘 시대는 끝났으므로 이제 노동자는 자본에 협력해도 보답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본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 실제로는 자본에 봉사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자유롭고 진보적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만연하다. 인간의 정신마저 포섭되어버린 것이다.

 

 

 

 

 

[2024.10.28. ~ 2024.11.04.]